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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의 역사

지금 우리가 먹는 빨갛고 도톰한 딸기는 실제로는 만들어진지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한다. 원래의 딸기는 우리가 오늘날 산딸기라고 부르는 쪽이 진짜 딸기이고, 현재의 딸기는 다른 식용품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여러 시도 끝에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현대 딸기의 시초는 1712년으로 가야된다. 프랑스의 식물학자 '아메데 프랑수아 프레지에가 칠레의 야생 딸기를 조사하기 시작했던 것이 그 시초다. 당시 프레지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칠레의 해안가를 뒤지며 야생 딸기 종자를 채집하며 기록했다고 한다. 그런데 반전은 프레지에는 사실 교수나 학자가 아니라 프랑스군 육군 정보국 소속 현역 중령, 즉 스파이였다.

 

프리지에의 진짜 목적은 칠레를 점거중이던 스페인군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딸기를 조사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해안가에 설치된 요새와 주둔 병력 등의 군사 정보는 물론이고, 스페인 총독의 근황과 원주민의 움직임까지 정치, 경제, 사회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스파이 활동을 해오던 것이라 수집한 기록물 역시 딸기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지만 군사암호들도 같이 수록되어져 있었던 것이다.

 

프레지에가 이런 활동을 한 까닭은 당시 유럽 왕가 문제 때문이었는데, 당시 스페인 국왕은 필리페 5세이고 프랑스 국왕은 루이 14세인데 필리페 5세는 사실 루이 14세의 손자로, 루이 14세는 손자의 왕권을 유지함으로써 스페인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스페인과 관련된 정보들을 다방면에서 수집하고 있었다. 이 중 칠레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프레지에 중령을 파견한 것이었다.

 

프레지에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1714년 프랑스로 귀국했다. 그리고 칠레의 해안가 방어 진지를 포함한 군사 정보가 담긴 지도를 제작해 루이 14세에게 제출했다. 루이 14세는 프레지에 중령에게 큰 상금을 금화로 주기도 했다고. 그런 것을 보면 그의 군사지도가 마음에 들었던 듯하다.

 

 

또 프레지는 그동안 관찰하고 스케치한 바닷가 토종딸기에 대해 책을 출판한다. 또 그 딸기종자를 파리에 심었고, 탐스러운 열매였지만 먹을 수는 없는 종자였다. 게다가 유럽에서는 풍토가 맞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예 열매조차 맺지 못했다.

 

그 이후로 유럽의 많으 식물학자는 칠레 딸기와 다른 야생 딸기를 교배해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맺기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영국의 필립 밀러가 남미 칠레의 야생 딸기와 북미 버지니아 주의 야생 딸기를 교배시켜 새로운 종자를 얻는 데 성공한다.

 

이 딸기가 지금 우리가 먹는 재배용 딸기의 원조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딸기의 역사는 200년에 불과하다.서양 딸기, 즉 양딸기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1920~30년대 무렵으로 추정된다. 딸기가 처음으로 동양에 전해진 것은 19세기 말이다. 네덜란드를 통해 일본에 관상용으로 처음 전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43년에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에서 처음 딸기 재배를 했다. 딸기라는 단어 자체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조선시대 중엽에 간행된 훈몽자회라고 한다. 이때 딸기라고 가리킨 것은 우리나라에서 자라나는 산딸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