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서적_허진모 저, 「휴식을 위한 지식 그림, 우아한 취미가 되다」
20세기를 살았다고 해도 믿을 만한 보스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년경~1516)는 15세기에 활동한 네덜란드 화가다. 하지만 그의 작품만 봐서는 15세기에 태어났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그의 상상력은 동시대를 넘어선, 그것도 몇백 년을 훌쩍 넘어선 것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매우 기괴하고 충격적인 이미지가 담겨있다. 그의 대표작품인 ‘쾌락의 정원’을 살펴보면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쾌락의 정원’은 세 폭으로 되어있는 제단화 형식으로 왼쪽은 에덴동산, 중앙은 타락한 세상, 오른쪽은 지옥의 모습이 담겨있는데, 그림 곳곳에는 조류인지 파충류인지 정확히 판명할 수 없는 기이한 생물체들이 등장한다. 특히 가운데 그림에는 기이한 동식물과 성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또 지나치게 큰 과일과 여러 물체가 혼합된 기괴한 구조물이 그림 속에 담겨있다.
패널을 닫았을 때 외부에 그려진 그림은 세상을 창조하는 신의 모습을 그리자유(Grisaille) 기법으로 그린 것이다. 마치 세상을 둘러싼 원이 둥근 지구를 닮았다고 하여 보스의 신비감이 더해지기도 했다. 이때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유럽을 강타하기 50여 년 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동물의 형상이나 동작, 그림에 등장하는 기계장치와 같은 소품, 건축물 등은 보스의 상상력을 잘 표현한다. 보스의 작품에 담긴 기묘한 상징성은 오늘날까지도 그 의미가 수수께끼처럼 남겨져 있으며, 그는 자유로운 화풍처럼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신비로운 화가로 알려져 있다.
슬픔을 유머로 승화시킨 장난꾸러기 브뤼겔
피테르 브뤼겔(Pieter Bruegel, 1525~1569)은 유머 감각이 뛰어난 풍속 화가다. 그의 작품에는 주로 많은 사람이 등장하며 그 속에는 유머가 배어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한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던 ‘윌리를 찾아라’라는 그림책이 떠오른다. 그런 그의 작품을 하나하나 파헤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과정임이 틀림없다.
브뤼겔은 조선 시대의 김홍도나 신윤복처럼 시대상을 알 수 있는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의 작품 ‘네덜란드의 속담’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림에 등장하여 당시 네덜란드에서 사용되던 속담을 설명하고 있다. 돼지가 술통 마개를 뽑는 장면은 미숙한 사람이 큰 사고를 내는 것을 빗대는 표현이며, 달이 그려진 간판에 오줌을 누는 것은 ‘달 보고 오줌 누기’라는 실현 가능성 없는 무모한 짓을 일컫는 속담이다. 작품 ‘어린아이들의 놀이’는 그 당시 어린이들이 하는 놀이를 묘사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유머적 요소를 담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작품 중 하나인 ‘유아살해’는 무장한 기사들이 어린아이를 어머니로부터 강탈해 찔러 죽이는 참극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한쪽 구석에 서서 벽에 노상방뇨를 하는 기사가 있다. 비극 속에 숨겨 놓은 작가의 숨구멍이자 슬픔 속에서 느끼는 해학이라고 할 수 있다.
브뤼겔의 작품들이 다소 가볍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의 인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는 종교개혁의 격변기 속에서 평생을 보냈으며 에스파냐의 종교 탄압과 수십년간 계속된 네덜란드 독립전쟁 또한 그가 평생 겪은 일이었다. 그런 절망감 속에서 그는 사랑하는 조국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그렸고 마냥 슬퍼하지 않는 유머 감각을 그림 속에 담았다.
400년 전의 만화 같은 그림체, 엘 그레코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는 베네치아 공화국 지배하에 있던 크레타섬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20대에 비잔틴 양식의 이콘화를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가, 26세에는 야망을 펼칠 곳을 찾아 베네치아로 가서 3년을, 그 후 로마에서 10년을 머물다 35세에는 스페인 톨레도에 정착하여 40년을 살았다.
엘 그레코의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이다. 엘 그레코라는 이름은 그리스인이라는 뜻의 라틴어 ‘그레코’에 에스파냐어 정관사 ‘엘’을 붙인 것으로 스페인에서 활동할 때 얻은 별명이다. 여기에는 그와 관련된 세 나라가 모두 들어있다. 사람들은 엘 그레코라 불렀지만, 그는 그림에서 잘 보이는 곳에 항상 그의 본명을 그리스문자로 서명했다고 한다.
그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그림의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얼굴이 길쭉하고 초췌하다. 그리고 그 인물들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으며 무언가를 갈구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비례가 맞지 않고 뒤틀린 인체와 현실감 없는 구도, 성스럽기보다는 침울한 종교화를 그렸던 그는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후세에 천재로 재평가된다.
그의 작품은 주제에 대한 묘사 역시 독특하기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예로 그의 작품 ‘예수의 성전정화’에서는 예수가 세상을 포용할 듯한 온화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구타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작은 채찍 하나를 들고 수십 명을 통제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가히 폭력적이다. 이는 엘 그레코의 장난기가 다소 발동한 것이 아닐까 보는 이로부터 평가되고 있다.
엘 그레코에 대한 재평가는 18세기 계몽주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정신병이나 난시를 앓았을 것이라는 그리 좋지 않은 평가가 계속 따라붙었다. 지금은 어떤 이와도 차별되는 독창적인 화풍과 자유로운 상상력이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전위적인 화풍은 19세기 후기 인상주의나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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